10년 전 내가 발표했던 <한국 아동의 정서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라는 논문은 초등학생들이 자신의
정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관한 설문조사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학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고 대답했지만, 고학년으로 갈수록 운다거나 발을 구르는 등
자신의 감정을 엄마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부모에게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위안을 구하기보다는 혼자 해결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도대체 아이들은 왜 부모에게 슬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일까? 부모들이 아이들의 감정 표현을 잘 받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가 슬픔·분노·짜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으레 꾸중을
한다. 그런 감정은 밖으로 드러낼 게 아니라, 그냥 참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아이가 울거나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뚝 그쳐!”하고 윽박지르거나 “매 맞아봐야 그칠 거야?” 하고 협박을 한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감정이 북받치기 전에 무조건 달래려고만 한다. 서러워 울고 있는 아이에게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서둘러 진정시키려 하고, 화를 내는 아이에게는 비위를
맞춰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아이의 감정 표현을 억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 스스로 괜찮아지길 기다리지 않고 부모가 중간에 끼어들어 괜찮아지기를 종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부정적인 정서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이가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는 게 잘못도 아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미움·분노·슬픔·짜증·불안 등의 정서를 느끼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정서를 느낀다는 것 또는
그런 정서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잘못된 방법으로 표현하거나 억누르는 데 있다.
울거나 화를 내는 아이를 윽박지르면 당장은 조용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내면에 남아 있다가 계속 쌓여 어느 순간엔가 문제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함께 일하던 조교 가운데 하나는 툭하면 눈을 흘기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물론 교수인 나한테까지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동기나 후배들을 향해 눈을 흘기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마도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정서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강요받았던 것 같다.
어린 그녀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때마다 부모는 “그러면 못 써”, “어디 엄마한테 짜증을내?” 하며
야단쳤을 것이다. 그 결과, 울거나 화를 내지는 않지만 대신 흘겨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어릴 때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미성숙한 방법으로 표현하게 된다.
아이의 정서적 표현을 억누르면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억눌림 뒤에 반드시 분노와 공격성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바람직하게 표출되지 못하고 억압된 감정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한다.
옛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부모가 아무 생각 없이 억누른 아이의 작은 감정
하나가 훗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건강하게 정서를 표현하도록 도와주자. 화나거나 짜증이 나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큰 소리로 울거나 심지어 엄마를 때리기까지 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을 최대한
빨리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야단치기나 겁주기가 아니다.
“너 지금 아주 화가 난 것 같다”, “뭔가 슬픈 일이 있었나보구나” 이 한마디면 된다.
엄마가 아이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아이는 잔뜩 감정에 북받쳐 있다가도
어느 정도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그야말로 마술 주문이 따로 없다.
아이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라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한다. 이럴 때는 아이를
꽉 힘주어 끌어안는 게 가장 좋다.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을 주어 꽉 안는 것이 비결이다.
아이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몇 분 정도 있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르르 진정이 된다. 아이가 다소 수그러들었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화가 난 건 알겠지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까지 화를 내게 만들면 네 기분이 더 나빠지거든”, “네가 큰 소리로 울면 동생이 잠
에서 깨잖아” 식으로 이유까지 설명해준다.
그런 다음 아이에게 바람직한 감정 표현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울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아이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엄마는 “네가 먼저 잘못했네.
그래놓고 뭘 화를 내고 그래?” 하고 심판을 보려 한다. 그러면 아이는 다시는 엄마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응, 그래서 화가 났구나. 엄마라도 굉장히 화가 났겠다” 하며 공감하고 동조해줘야 아이에게서
계속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잘잘못은 그 다음에 가려도 늦지 않다.
그런 다음에는 기분 전환의 단계가 필요하다. 일단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네 기분이 풀릴까?” 하고
물어본다. 아이가 잘 모른다고 하면 엄마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신나게 춤을 추는 방법을
제안해보면 좋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아이는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게 된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이 감정을 적절하게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 스스로
그 방법을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된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을 받아온 아이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적다.
타인이 자신을 화나게 하거나 슬프게 하더라도 꾹꾹 눌러 참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 표현에 귀 기울이고
깊이 공감할 줄도 안다. 어쩔 수 없는 문제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더라도 혼자서만 끙끙 앓거나
속으로 삭이지 않는다. 친한 친구나 부모에게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안을 받으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감정 조절 능력은 안정된 정서와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니 감정 조절 능력이야말로
조기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